지적학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시기다.
조선시대는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넘쳐나는 문서들로 증명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총 1893권, 888책으로 이루어져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가치에 대해 알아보자)
경국대전에 쓰인 토지의 종류
경국대전은 모든 토지를 6등급으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 정전 : 항상 경작하는 토지
- 속전 : 땅이 메말라 계속 농사짓기 어려워 경작할 때만 과세하는 토지
- 강등전 : 토질이 점점 떨어져 본래의 전품, 즉 등급을 유지하지 못하여 세율을 감해야 하는 토지
- 강속전 : 강등을 하고도 농사짓지 못하여 경작한 때만 과세하는 토지
- 가경전 : 새로 개간하여 세율도 새로 정하여야 하는 토지
- 화전 : 나무를 불태워 경작하는 토지로, 경작지에 포함시키지 않는 토지
토지의 구분뿐만 아니라 실시하는 기간도 정해져있었다.
- 위와 같이 구분하여 20년마다 한 번씩 양전을 실시, 그 결과를 양안에 기록하며, 양전을 할 때는 균전사를 파견하여 이를 감독하고, 수령 및 실무자의 위법사례를 적발 처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인력 및 경비 등이 막대하게 소요되는 대사업인 것을 이유로 규정대로 실시하지 못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이 더 지난 뒤에 실시하기도 하여, 고려 말인 1391년(공양왕 1.1.3 전제 개혁) 때와 조선의 태종, 세종 때에 전국적인 양전이 실시되었다. 성종 때 하삼도(경상, 전라, 충청)에 부분적으로 실시한 것과 임진왜란 이후 황폐화한 국토를 정리하기 위해 지역별로 차례로 시행된 적이 있다.
전제상정소란 무엇일까?
조선 세종 25년, 토지 및 조세 제도의 연구와 공법 제정을 위해 설치했던 임시 관청이다. 세종 12년, 과전법에서 규정한 삼등전품제와 답험손실법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세법 개정에 착수하여, 동왕 25년(그 해라는 뜻이다) 경무법과 오등전품제, 연분구등제를 골격으로 하는 공법을 만들었다. 새로 마련한 공법의 구체적 절목(절목의 종류는 다양한데 국가가 진행하는 사업 노동자와의 계약서, 절차의 설명 등을 적은 문서를 말한다.)을 만들고 그 시행을 추진할 기구로서 같은 해 전제상정소를 설치하였다.
- 세종 25년에 순식간에 만들어진 기구라는 것은 임시 부서였다는 것을 뜻한다.
골격은 경무법, 오등전품제, 연분구등제였으나
세종 26년(그다음 해)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을 제정하였고 여전히 결부제를 계속해서 사용했다.
전제상정소에서 진행했던 개혁
전제상정소는 세제 개혁안을 마련하고 토지를 측량하여 토지 등급을 책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세제 개혁안을 여러 지역에 적용하여 1444년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분류하는 전분육등법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등급의 면적을 결정하는 결부제를 채택하는 원칙을 마련하였다.
연분구등법
조선시대 농작의 풍흉을 9등급으로 구분하여 수세의 단위로 편성한 기준으로 1444년(세종 26년)부터 실시한 조세 부과의 기준이다. 조선시대의 공법 전세제에서 농작의 풍흉을 9등급으로 나누어 지역 단위로 수세하던 법으로, 일종의 정액세 법이다.
전분육등법
1444년(세종 26년)에 새로운 전세제도로 확정된 공법으로 토지의 질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하여 각 등급에 따라 전지의 결, 부의 실적에 차등을 두는 수세 단위로 편성하였다.
*연분구등법과 전분육등법은 동시에 적용되던 전세 제도였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구의 풍흉 상황이 5등급이고 강남구 역삼동 몇 번지의 비옥도가 6등급이라면
5x6=30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즉 6x9=54가지의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했던 제도다.
전제상정소는 세종 25년에서 26년 사이, 순식간에 세워졌다.
불과 2년 만에 부서가 생기고 전세제도가 시행되었다.
임시 부서였으나 세종의 세제 개혁의 강한 의지가 투영된 매우 강력한 부서였다는 뜻이다.
양안이란 현대의 지적 공부다.
양안은 긴 조선시대를 거치며 일반적으로 10여 가지 이상의 이름으로 불렸다.
또 조제 연도나 국왕의 열람 여부, 행정기관이나 소유권에 의해 10여 가지의 다른 이름 불리기도 했다.
20개가 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다만, 읽을만한 글을 쓰고 싶기에 너무 많은 정보를 담지 않기로 하자.)
양안은 왜 작성하지?
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다. 호전 양전조에는 "모든 전지는 6등급으로 구분하고 20년마다 다시 측량하여 장부를 만들고 호조와 그 도, 그 읍에 비치한다."라고 쓰여있다. 쓰여있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어딘가에 기록하는 것이 맞다. 다만 양안의 경국대전은 양안의 작성 방법과 보관 방법에 대해 자세히 정하고 있다.
양안은 고려 시대에도 존재했다.
양안은 조선시대에만 존재했다는 오해가 있다. 하지만 양안은 고려 시대에도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더 발전된 형태로 나타난다. 마치 답험손실법이 고려 시대 후기 공민왕 때부터 조선 세종 전제상정소 이전까지 존재한 것처럼 말이다.
과거와는 달랐던 신양안
신양안은 1898년 7월 6일 양지아문이 창설된 때부터 1904년 4월 19일 지계아문이 폐지된 기간에 시행한 양전 사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조금 더 체계적인 3단계를 통해 총 3부로 만들어졌는데, 이를 통해 지적 측량 업무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야초 책
1필마다 토지측량을 행한 결과를 최초로 기록하는 장부다. 전답과 초가, 외가의 구별, 배미, 양전 방향, 전답 도형과 사표, 실적, 등급, 결부, 전답 수 및 소작인 기록을 등재했다.
중초 책
야초작업이 끝난 후 만든 양안의 초안이다. 서사 1명 산사 3명이 종사하고 면도감이 감독했다. 일자오결(지번) 등을 추가 수록했다고 알려져 있다.
정서 책
최종본이다. 3단계 작업으로 완성한 양안으로 면에서 중초 책을 완성하면 읍에서 취합하여 작성, 완성하는 정안이다. 정안은 3부를 작성하여 1부는 양지아문에, 1부는 도의 감영에, 1부는 읍에 보관하였다. (일반 양안은 양지아문 대신 호조에 보관하였는데, 이는 1898년 양지아문이 생긴 이후 지적 사무는 양지아문에서 담당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적혀있는 내용은 새 발의 피다.
일제가 우리나라의 책들을 그렇게 많이 불태웠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자세히 전해지고 있는 조선시대다.
그만큼 자료도 많고 책에 따라 누락된 내용도 많다.
만약 더 깊은 관심이 생긴다면 지적학 총론을 구매하여 자세히 읽어보자.
한국 국토정보 공사와 한국지적학회 공동 저의 권위 있는 책이다.
(다만 가독성은 그리 높지 않아 도전해 볼 분들만 도전해 보길 바란다.)
'지적학에 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적학 11. 조선 시대 입안, 문기 (0) | 2023.01.10 |
---|---|
지적학 10. 조선 시대의 양전 개정론 (+결부제와 경무법) (0) | 2023.01.10 |
지적학 8. 고려시대의 토지 제도(역분전, 전시과, 녹과전, 과전법)+한국사 공부의 필요성 (0) | 2023.01.09 |
지적학 7. 삼국시대 지적 제도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들(고구려, 신라, 백제) (0) | 2023.01.09 |
지적학 6. 상고시대의 지적 제도 발달 과정(+위서 단기고사) (0) | 2023.01.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