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전 개정론이란 조선 시대 토지 제도 문란으로 인해 나온 당대 많은 학자들의 주장 모두를 일컫는다.
양전이란?
국가 차원에서 토지를 조사 및 측량하여 실제 면적과 위치, 작황을 파악하던 제도다. 중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토지를 이용해 농민을 지배하에 두기 위한 작업이기도 했다. ("지적학 9. 경국대전에서 정한 양전의 실시 기준")
사실 조선조 건국 이념을 신하들이 왕을 가르쳐 이끄는 왕도정치로 만든 정도전은 토지제도의 문란이야말로 사회 불균형의 원인이며 민생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파악하였는데, 토지 문란의 문제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저물 때까지 심화되면 심화되었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요인의 파악보단 행동과 실천이 중요한 것인데 말이다.
양전 개정을 주장한 학자들 몇을 살펴보자.
정약용
양전법 개정을 위해 정전제의 시행을 전제로 하는 방량법과 어린도법의 시행을 주장했다. 결부제를 경무법으로 고칠 것을 주장하였고 일자오결법, 사표법의 부정확성을 시정하기 위해 어린도 작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기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정전제나 어린도 같은 국토의 조직적인 관리가 필요함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어린도 작성으로 풍흉을 조사할 때 부정을 방지할 수 있으리라 보았고 전국의 전을 정방형으로 구분하여 사방이 백 척으로 된 1결의 형태로 작성하는 것을 주장했다(이게 정전법이다.).
정약용이 저술한 책들은 많지만 지적에서는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에 자세히 살펴볼 요소들이 많다.
서유구
정약용과 뜻을 같이 한다. 결부제를 폐지하고 어린도를 작성하자 주장한다. 그나마 정약용과의 차이는 구거 삼각법에 의한 양전수법십오제를 마련하자는 것과 양전 사업을 전담하는 전문 관사를 설치하자고 주장했다는 것인데. 이 글을 쓰는 나는 아직 이게 어떤 말인지 모른다.(시험을 준비할 때 눈으로만 흘기고 간 기억이 있다.) 그래서 나는 정약용보다 두 살 동생의 귀여운 서유구로 이 사람을 기억한다. 그의 저서로는 의상경계책이 있다.
이기
수등이척법에 대한 개선으로 망척제를 주장했다. 여기서 망척제란 토지에 큰 그물을 던져 그 그물의 구멍을 세자는 것이다. 정확한 면적의 산출이 중요하다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쓰이는 그물은 정 방향의 눈들을 가진 그물이어야 한다고 했으며 도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용했던 전형(정사각형 직사각형 직각삼각형 이등변삼각형 사다리꼴 사각형)에 구애됨 없이 그물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계산하자 주장했다. 그의 저서로는 해학 유서가 있다.
유길준
양전 후 지권을 발행하고 리 단위의 지적도를 작성할 것을 주장했다. 재정개혁을 위한 방안으로 *지조 개정을 주장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했고 면장 밑에 호통장과 지통장을 두어 호통장이 호구, 지통장이 전제를 관장케 하고 군에는 군감 밑에 호통감과 지통감을 두어 지통감이 양전 업무를 관장케 하라고 주장했다. 측량을 시행하여 전국의 지적도를 마련한 후 지방관들이 매년 이를 조사하고 주에서는 5년에 한 번씩 개정, 호부에서는 10년에 한 번씩 개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지조 개정 : 전국적으로 조세의 양을 재확정하는 과정을 지조 개정이라고 한다. 리 단위의 지적도 작성과 지통장이 양전 업무를 관장케하자고 주장한 것 역시 이 지조 개정의 주장을 위해 나왔다. 그의 저서로는 서유견문이 있다.
이익
한전론을 주장했다. 한전론이란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양을 제한하자는 것인데, 문자 그대로만큼 괴팍한 주장은 아니다. 개인의 생존에 필요한 토지의 양을 정하여 그만큼은 매매를 금지하고 나머지의 토지는 매매가 가능케하여 결국 백성들 전부가 토지를 평분하게 되는 미래를 꿈꾼 것이다. 사실 이 주장은 이익이 처음은 아닌데, 조선 초기 일부 권세가들이 과도하게 토지를 소유하면서 중국의 한전법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시행되지 못했고 조선 후기 토지가 일부의 지주들에게 편중되며 한전론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다만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자도 일정한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점과 다수의 토지 소유를 제한할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고 실현되지 못했다.
그의 저서로는 성호사설, 사서삼경 등이 있다.
양전의 개정을 주장했던 유학자들의 공통점
결부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경무법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다.
(경무법은 보통 정전제와 함께 등장하는 개념으로 맹자가 설하며 유학자들이 종교처럼 믿게 되었다.)
결부제과 경무법 비교 (잘못 알려진 개념)
지적과 관련된 많은 책들을 살펴보면 보통 백성들 입장에서 결부제는 주관적인 면적 측정 방법으로, 경무법은 객관적인 면적 측정 방법으로 묘사되곤 하는데 그렇게 볼 여지가 없진 않으나 사실 비틀려 기술된 것이다.
(많은 유학자들이 결부제를 주장하여 이렇게 와전되어 전해진 것 같으나 위 링크 지적학 6~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유학자들의 맹자를 향한 덕질에 불과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결부제는 비옥도에 따라 면적을 측정하는 척을 달리하였고 경무법은 비옥도가 달라도 같은 척을 이용해 면적을 측정하였다. 경무법은 평야지대가 넓게 펼쳐져 비옥도의 차이가 크지 않은 중국에서 유리한 방법으로 중국 대륙에서는 객관적인 방법이었을지 몰라도 산악지대가 대부분이어서 토지의 비옥도가 크게 다른 한반도에서도 객관적인 방법이었을지 의문이다.
또,
결부제는 1결당 면적은 달라도 징수 세액이 같은 개념이고
경무법은 1결당 면적은 같으나 징수 세액이 다른 개념이다.
결부제를 예로 들어보면
위에 보이다시피 비옥도에 따라 1척의 길이는 다르게 하나 세금을 같게 하는 것이 결부제다.
이와 반대로 경무법은 비옥도에 상관없이 1척의 길이는 같으나 세금이 다른 개념이다.
결국 결부제는 조세의 정도가 높고 경무법은 면적 측정의 정도가 높다는 말이다.
면적 측정의 면에서 경무법이 결부제보다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으나 결국 두 방법 모두 사람의 판단을 포함해 조세하는 제도라는 한계 탓에 조선 시대 관리들이 청렴하지 않았다면 백성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불리한 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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